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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너와 나를 타고 넘으며, 깊고 먼 공간으로    

 박수현 (예술학, 미술비평)

숲 속을 연상시키는 미지의 공간. 이곳에는 여러 개의 지평선과 이질적 공간이 교차하며 식물은 뒤집히고 부유한다.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의 공간보다는 가상공간에 가깝다.가상공간은 현실을 초월하고 역사와 제도를 벗어난 공간이다. 인간 삶을 제한하는 외부적 힘, 육체와 의식의 한계로부터도 자유로운 무한한 세계이다. 

식물 형태가 가진 유동성에 기대어 작가는 자유롭게 그림을 구성한다. 식물의 각 부분을 해체하고 자연법칙이나 식물의 생태에 매이지 않는 유연한 방식으로 재조합한다. 인간의 현실과 자연으로부터도 벗어난 공간과 그 안에서 창조되고 생성되는 유기체들의 비정형적 형태. 이는 개인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현실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자 자신을 얽매는 것들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를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공격적인 방식이 아닌,식물의 모습을 빌린 평온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식물들은 서로 겹치고 얽혀있으며 때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 모습은 자아와 타자가 명백히 구분되고 나의 공간과 너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멀어져버린 타인과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개체들이 몸을 부대끼며 공존하는 장면은 우리가 함께 기대고 어우러져 살아갔던 그 언젠가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얽히고설킨 군상 안에서 한 부분 한 부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된 식물들은 그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아직 건재함을, 생명의 힘을 발하고 있음을, 쉽게 스러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들은 작가 스스로의 투영이자 지금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빛을 발하는 작은 존재들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이들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다. 

작가는 어떠한 메시지나 의도를 전달하는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타인의 평가와 기준,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으로부터 잠시 떠나 마음을 다독이듯, 식물을 심고 돌보듯, 섬세한 터치들을 겹치고 쌓아간다. 이러한 수행적인 행위는 보는 사람을 그의 자리에 초대한다. 선 하나하나에 머물렀을 시선을 따라 식물을 바라보며, 그 대기를 느끼며, 자신을 투영한다. 

 

그림의 구성은 작가의 심리상태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작가는 과감한 화면분할과 역동적인 구도를 실험하기도 하고, 내러티브를 암시하는 형태와 강렬한 색채, 설치의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적은 마침내 잔잔한 풍경에 다다른다. 맑고 다채로운 색감은 안정된 구도 안에서 자리잡으며 화사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새벽녘 모든 사물에 푸른빛이 깔리듯, 배경과 개체들은 같은 빛을 머금는다. 이들을 바라보며 현실과 규형을 잡고 내면의 평온을 가다듬는다. 침묵 속에 자신을 성찰하며, 또한 동시에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과 개방된 공간을 마주한다. 마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듯, 삶과 작품의 새로운 지평선이 펼쳐지듯, 넓은 공간으로 열린다. 어떤 사건과 일들이 있을지 불투명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설레는 곳으로, 현실과 가상, 나와 너의 경계를 흐리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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