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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너와 나를 타고 넘으며, 깊고 먼 공간으로

박수현 (예술학, 미술비평)

 

배경색을 칠한 캔버스 위에 펜을 올린다. 특별한 구상이나 계획 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손을 움직여 공간을 채운다. 각양의 식물 형태는 마치 식물이 생장하는 과정을 따르듯 불규칙하게 퍼져나가며 서로를 타고 넘으며 흘러간다. 화면을 섬세하게 만지는 선들은 중첩되면서 밀도 높은 흑백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 위에 투명하게 색을 입힌다. 색상이 배경을 머금고 올라오며 풍경에 스며든다.

                           

 

손서현의 그림은 사유할 수 있는 마음 속 공간을 탐구한다. ‘공중정원’, ‘오아시스’, ‘고요의 풍경’ 등으로 불리는 이 장소는 인간의 현실 세계를 떠난 작가만의 안식처이다. 작가는 식물의 모습에 기대어 감정을 펼쳐내고 정제하면서 평온한 내면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숲 속을 연상시키는 미지의 공간. 이곳에는 여러 개의 지평선과 이질적 공간이 교차하며 식물은 뒤집히고 부유한다.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의 공간보다는 가상공간에 가깝다. 가상공간은 현실을 초월하고 역사와 제도를 벗어난 공간이다. 인간 삶을 제한하는 외부적 힘, 육체와 의식의 한계로부터도 자유로운 무한한 세계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의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공간. 작가는 현실의 공간을 떠나 이곳을 방문하는 상상을 한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피라미드 아래에 위치한 미궁의 비유를 통해 가시적 세계 이면에 있는 본질적 공간을 고찰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피라미드라는 이성적이고 권위적인 구조를 세워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그 아래에 있는 미궁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규정할 수 없는 무질서한 장소 안에 있다. 미궁은 이성 아래 가려진 욕망과 의식 아래 가려진 무의식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궁과 같이, 작가가 탐구하는 내면의 공간은 비록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아래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거주하는 더욱 근본적인 장소라 할 수 있다.

이 공간 안에 세계 각지에서 자라는 서로 다른 생태를 가진 식물들이 자리한다. 실존하는 식물과 상상 속의 식물이 함께 만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몸에는 정해진 형태가 있다. 이를 벗어나는 것은 기형으로 정의되며 몸이 절단되거나 파괴되는 일은 치명적이고 영구적인 장애를 남긴다. 식물에도 그 종과 속을 결정하는 외형의 특징이 있지만 동물에 비해 유연하다. 마디마다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생장점들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예측불가능하게 발현되어 각기 다른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또한 여러 생식법을 병행하여 다양한 양상으로 자신을 확장한다. 따라서 식물의 형태는 살아있고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 만약 인간의 신체에 정해진 형태가 없다면, 그래서 각기 다른 모습과 개수의 신체가 비정상이 아닌 당연한 다양성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의 삶은 각종 사고와 재해의 두려움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타인에 대한 가치판단과 위계, 편견으로부터도 다소간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식물 형태가 가진 유동성에 기대어 작가는 자유롭게 그림을 구성한다. 식물의 각 부분을 해체하고 자연법칙이나 식물의 생태에 매이지 않는 유연한 방식으로 재조합한다. 인간의 현실과 자연으로부터도 벗어난 공간과 그 안에서 창조되고 생성되는 유기체들의 비정형적 형태, 이는 개인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현실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자 자신을 얽매는 것들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에 대한 모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를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공격적인 방식이 아닌, 식물의 모습을 빌린 평온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식물들은 서로 겹치고 얽혀있으며 때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 모습은 자아와 타자가 명백히 구분되고 나의 공간과 너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멀어져버린 타인과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개체들이 몸을 부대끼며 공존하는 장면은 우리가 함께 기대고 어우러져 살아갔던 그 언젠가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얽히고설킨 군상 안에서 한 부분 한 부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된 식물들은 그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아직 건재함을, 생명의 힘을 발하고 있음을, 쉽게 스러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들은 작가 스스로의 투영이자 지금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빛을 발하는 작은 존재들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이들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다.

이 풍경은 작가가 ‘Silentscape’라고 부르듯 수많은 말들로부터 멀어진 고요한 풍경이다. 루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침묵은 다른 생명을 듣게 해주는 근원이자 매개라고 주장한 바 있다. 침묵은 상대방을 침범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게 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식물과 소통하기 위해선 침묵을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 식물은 말이 없지만 공기, 습도, 토양, 온기, 햇빛 등에 민감히 반응하며 상호작용한다. 언어가 제거된 깊은 침묵 속에 몸 전체를 통해 환경 및 다른 개체들과 소통하고 공존한다. 이러한 식물을 마주한다. 말없이 귀를 기울여 듣고 그와 더불어 존재한다. 우리 또한 침묵 속에서 나의 살아있는 존재를 회복한다. 일상을 살아갈 힘을 되찾는다. 

작가는 어떠한 메시지나 의도를 전달하는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타인의 평가와 기준,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으로부터 잠시 떠나 마음을 다독이듯, 식물을 심고 돌보듯, 섬세한 터치들을 겹치고 쌓아간다. 이러한 수행적인 행위는 보는 사람을 그의 자리에 초대한다. 선 하나하나에 머물렀을 시선을 따라 식물을 바라보며, 그 대기를 느끼며, 자신을 투영한다.

그림의 구성은 작가의 심리상태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작가는 과감한 화면분할과 역동적인 구도를 실험하기도 하고, 내러티브를 암시하는 형태와 강렬한 색채, 설치의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적은 마침내 잔잔한 풍경에 다다른다. 맑고 다채로운 색감은 안정된 구도 안에 자리 잡으며 화사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새벽녘 모든 사물에 푸른빛이 깔리듯, 배경과 개체들은 같은 빛을 머금는다. 이들을 바라보며 현실과 균형을 잡고 내면의 평온을 가다듬는다. 침묵 속에 자신을 성찰하며, 또한 동시에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과 개방된 공간을 마주한다. 마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듯, 삶과 작품의 새로운 지평선이 펼쳐지듯, 넓은 공간으로 열린다. 어떤 사건과 일들이 있을지 불투명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설레는 곳으로, 현실과 가상, 나와 너의 경계를 흐리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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